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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시프 스탈린/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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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소전쟁]] == 1934년,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와 그의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이 집권한 이후 노골적으로 반볼셰비즘을 표명했다. 따라서 [[소련]]을 디스하며 주변의 소국을 병합, 소련의 안보를 위협하게 된다. 이에 소련은 안보적 위기를 느끼게 되었으며, 스탈린은 [[대숙청]] 와중에도 꾸준히 국방력을 증진하기 위해 병력을 늘리고 무기를 생산했다. 스탈린은 [[영국]], [[프랑스]]와 손을 잡고 히틀러를 막아보려 했으나, 두 국가는 소련을 노골적으로 무시했고[* [[뮌헨 협정]] 이후 독일에 대한 불신과 1938~1939년 들어 폴란드 위기가 번질 때 영불 대사가 [[모스크바]]에 가서 스탈린과 대면해서 협상을 한 적이 있었다. 이때 스탈린은 "만일 독일의 침공에 대비해 독일을 공격한다면 소련은 200개 사단을 동원할 용의가 있다. 영불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는데, 이에 영국 대사는 영국 본토에 '''육군사단 3~5개'''를 원정군으로 동원할 수 있다는 드립을 쳤고 프랑스 대사는 전쟁 의지에 대해 머뭇거렸다. 이에 스탈린은 "이런 도둑놈들! 우리는 200개 사단이나 동원하는데 저놈들은 손도 안 대고 코 풀려고 하네?"라는 반응을 보이며 서방이 [[이이제이]]를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한층 더 강화했다. 다만 프랑스는 몰라도 영국에게는 실드를 칠 여지가 있는데, 영국은 전통적으로 대륙에서 전쟁이 터질 거라 예상되면 육군 사단보다는 해공군 투자 혹은 전쟁에 쓸 재원 마련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독일에게 침략당해도 소련의 개입을 허용할 수 없다는 [[폴란드]]의 고집 때문에 협상은 결렬되고 만다. 결국 스탈린은 서방 각국을 불신하게 되었고, 이때 히틀러는 서방과 전쟁을 치르기 위해 소련과 [[폴란드 침공]] 직전인 1939년 8월 유럽을 독소가 반분하자는 비밀 조항을 넣은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이후 히틀러가 서방 각국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소련은 비슷하게 폴란드 동부, [[발트 3국]], [[루마니아 왕국]]의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 [[핀란드]] 일부(카렐리야 지방)[* 사실 핀란드도 통째로 꿀꺽하려고 했지만 [[겨울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는 바람에 카렐리야 지방만 점령하는 선에서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손바닥만한 나라인 핀란드에게 얻어터진 스탈린은 1939년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를 차지해 대가는 톡톡히 챙긴다. 게다가 스탈린은 자신이 배신했을 경우의 상황을 히틀러가 바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히틀러에게 협상하는 자세가 아니라 고압적인 자세로 여러 가지 사항을 요구하여 여러 가지 수많은 이익들을 챙겼다.[* 이러한 태도는 히틀러를 화나게 만들기도 해서 히틀러는 스탈린을 피도 눈물도 없는 강도라고 비유했다.] 그러나 독일이 엄청나게 빠른 시간 만에 [[프랑스 침공]]으로 프랑스를 함락시키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영국군마저 거의 전멸 위기에 놓여 영국의 함락도 거의 코앞에 이르게 되자[* 당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은 프랑스뿐만이 아니라 영국조차도 한 번에 독일에게 점령당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히틀러는 [[바다사자 작전]]을 수립해 영국 본토를 점령할 계획을 수립하기도 했지만, [[영국 본토 항공전]]이 발발했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영국 점령에 실패했다.] 스탈린은 깜짝 놀랐다. 이때부터 스탈린의 태도는 점점 부드러워지기 시작했고, 히틀러가 요구하는 일들은 그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최대한 협조해 주었다. 그러나 [[게오르기 주코프]]를 위시한 소련의 여러 장군들은 이런 스탈린의 태도가 전쟁이라는 재앙을 불러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고, 독일이 소련과의 전쟁을 벌일 수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하자 주코프는 스탈린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전쟁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하며 경계령을 내려주라고 화를 냈다. 그러나 스탈린은 화를 내면서 히틀러를 건드리면 안 되며 그렇게 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2015년 [[한국방송공사|KBS]]에서 광복 70주년에 맞춰 방영했던 '세계 대전'이라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교수에 따르면 당시 스탈린은 "영국도 굴복시키지 못하는 히틀러가 설마 우리 소련을 치겠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스탈린이 히틀러를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스탈린은 히틀러가 단시간에 독일 민족을 통합하고 독일 내에 상당한 세력을 가진 [[독일 공산당]]을 완전히 전멸시켰던 모습, 특히 [[유럽]]의 거의 대부분을 순식간에 정복한 히틀러가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히틀러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남의 뒤통수를 쳐도 전혀 죄책감이 없는 인간이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히틀러가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또라이가 아니라면 적어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양면전쟁]]을 벌이다가 패망한 [[독일 제국]]을 이끌어 영국과 전쟁이 끝나기 전에 소련을 침공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전쟁 준비에 몰두하던 스탈린에게서 "1943년에는 전쟁을 할 준비가 마련된다"라는 스탈린의 말을 들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열심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문제는 히틀러가 바로 그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희대의 또라이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탈린이 히틀러의 침공 대비를 전혀 안 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지 않을 것이라 본 것이지, 히틀러가 소련을 방치할 것이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소련의 붉은 군대 숫자는 증강됐는데, [[대숙청]]이 한참이던 1938년 당시 150만 명이던 붉은 군대는 1941년이 되면 숫자가 400만 명으로 증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하게 될 T-34 전차나 보로실로프 전차 등도 이 시기에 처음 제작되었다. 전쟁 전 소련의 군수 생산을 자세히 보자면 1930년 연평균 탱크 생산 대수는 740대였는데 1938년에는 2,271대로 늘어났다. 1932년 소련은 사상 최초로 2개의 기계화 군단을 편성했는데, 이는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최초의 기갑 사단을 창설하기 3년 전에 달성한 성과였다. 같은 기간 동안 연평균 항공기 건조 수는 860대에서 5,500대로 증가했다. 1939년 1월 1일과 1941년 6월 22일 동안에 일어난 소련 군수 산업의 생산량은 인상적이다. 당시 소련의 붉은 군대는 2만 9,637문의 대포와 5만 2,407문의 박격포를 포함하여 포는 9만 2,578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82mm와 120mm의 새로운 박격포가 전쟁 직전에 생산됐고, 소련 공군은 1만 7,745대의 전투기를 보유했으며, 이 중 3,719대는 신형 전투기였다. 소련의 붉은 군대는 7,000대 이상의 탱크를 제공받았다. 1940년에 독일의 주력 전차보다 우수한 중형의 T-34와 보로실로프 전차(KV 중 전차) 생산이 시작됐다. 전쟁이 발발했던 1941년 6월 기준 1,851대의 신형 전차가 생산된 상태였다. 적잖은 전투기와 전차가 이 기간에 생산됐다. 그러나 "설마 1941년에 들어오겠느냐?"라고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소련을 침공하려는 사람들이나 이를 막아내려는 소련인들이나 [[동장군]]은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계산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면 겨울이 올 때까지 침략할 시간이 충분한 봄에 침공을 하는 게 유리하다는 것 역시 양쪽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1941년의 독일군은 [[유고슬라비아 침공]] 때문에 한여름이 될 때까지 침략을 하지 못했기에 언젠가 전쟁은 하겠지만 올해는 아닐 것이라는 의견이 강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모두의 예상을 송두리째 뒤집어 버렸고, 결국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 30분부터 [[바르바로사 작전]]을 개시하여 [[독소전쟁|소련을 침공한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전쟁에 휘말린 소련군은 개전 몇 시간 만에 전투기 1,200대가 이륙하지도 못하고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고, 소련의 전방 보급기지들은 인근 부대에 탄약을 공급하기도 전에 점령되었다. 독일군은 그날 단 하루 만에 발트 3국으로부터 60~80km, [[벨라루스]]로 40~60km, [[우크라이나]]로 10~20km까지 진격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독일군의 진격 속도에 혼란에 빠진 소련군은 지금 독일군이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부랴부랴 동원된 부대들은 새로운 숙영지로 이동 중에 독일군의 공격을 받아 궤멸되거나, 전선에 도달한 직후 제대로 된 정보 없이 무턱대고 싸우다가 몇 시간 만에 사라졌다. 대숙청으로 부대 지휘에서 보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소련군은 [[겨울전쟁]]에서 보여준 문제를 여전히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소련군은 3백만 명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는 재앙을 당하고 와해 직전까지 몰렸다. 주코프의 회고와 독소전쟁 개전 상황을 다룬 챠콥스키의 '봉쇄'에 따르면 당일 [[크렘린]]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개전 당일 주코프와 여러 장군들은 새벽 3시 30분부터 국경에서 폭격이 시작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그들은 스탈린의 측근들에게 스탈린을 깨워서 모스크바에 데려오도록 했다. 한편 잠자고 있던 스탈린은 독일군이 소련 도시들을 공습하고 있다는 주코프의 전화를 받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크게 심호흡을 한 후에 주코프에게 [[이뭐병|그 어떠한 전투도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 뒤에 [[리무진]]을 타고 모스크바로 간 스탈린은 이미 회의를 하고 있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주코프 같은 최측근과 장군들과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독일이 침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망연자실하였고 매우 창백하고 당황한 얼굴로 '''빈 파이프를 뻐끔거리면서''' [[현실도피|이 상황을 믿지 않으려고 하였다.]] 스탈린은 이 회의에서조차 이 공격이 단지 제한된 도발이라고 믿고 있었다. 심지어 [[세묜 티모셴코]]가 '우리의 도시를 공습하는 걸 그냥 도발이라고 할 순 없다'라고 말하자 스탈린은 "그렇다면 독일의 장군들이 자신의 도시를 폭격해서 도발을 했을 것이다"이라면서 독일 지도자 히틀러가 그럴 위인이 아니라고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었고 '''"히틀러는 분명히 이 상황을 모를 거야."'''라고 푸념하듯이 말하면서 [[히틀러]]가 [[루거우차오 사건|전쟁을 명령한 것이 아니라, 독일의 일개 장군들이 음모를 일으킨 것이거나 독단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끝까지 믿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지휘부의 누군가가 "히틀러는 이 '''도발'''에 대해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니 독일 측의 정확한 의도를 알아야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스탈린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몰로토프를 독일 대사관에 파견했다. 독일 대사관에 도착한 몰로토프는 그곳에서 만난 독일 대사 슐렌부르크[* [[https://en.wikipedia.org/wiki/Friedrich-Werner_Graf_von_der_Schulenburg|베르너 폰 슐렌부르크]] 백작(1875년 11월 20일~1944년 11월 10일) [[나치 독일]]의 마지막 소련 대사. [[독일 제국]] 시절부터 활약한 외교관으로, 독소전쟁 발발 이후 몇 주 동안 억류되어 있다가 송환을 위해 튀르키예로 보내졌다. 1944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당한다. 참고로 암살자 그룹의 내각 계획에 외무장관으로 포함되어 있었다.]에게 '''히틀러가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몰로토프는 그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을 받은 나머지 말을 더듬거리며 '''"우리가 귀국에 그럴 만한 짓을 한 적이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소식을 전해들은 스탈린 또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몸에 힘이 빠졌는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뒤 오랫동안 견딜 수 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다 소련 지도부 사이에서 거의 유일하게 주코프가 독일군을 저지해 보겠다고 여러 가지 전략들을 이야기했지만, [[이반 코네프]]는 '''"저지가 아니라 전멸이겠지."'''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몰로토프는 별개의 인터뷰를 통해 주코프가 황당한 소리를 했다고 까면서 자신은 슐렌부르크에게 그런 감상적인 말을 한 적도 없고, 그가 제시한 정치국 회의 시간도 틀렸다고 하면서 주코프가 회고록에서 자신을 과시하려 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몰로토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주코프의 보고를 듣고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해서 보고할 것, 그리고 선동적 보고를 액면 그대로 믿지 말라고 지시하였고 한다. 한편 챠콥스키 등은 전쟁 발발로 충격을 받은 스탈린이 열흘 이상 집무를 보지 않고 은둔했다고 주장했다. 세묜 티모셴코는 스탈린에게 어떻게 전쟁을 이끌어야 되겠냐를 물어보기 위해 스탈린을 만났지만 스탈린은 그를 못 본 척했다고 한다. 그는 그 와중에도 오로지 정치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정치부 회의에 참석했다.[* 스탈린의 이 멘탈붕괴는 인간 스탈린의 나약함을 드러낸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스탈린이 어떤 생각으로 현 정세에 임하고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그럴 만하게 비춰질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임을 일단 언급하지만, 일단 스탈린은 그 전부터 히틀러에 대해서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효웅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자신처럼 정세에 대한 계산이 가능하며 상황에 대한 통찰력을 가진 정치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은 1선 장군들이 뻔히 보이는 전쟁의 전조를 경고함에도 불구하고 계산이 서는 날카로운 정치가인 히틀러에 대한 판단을 중시했기에 무시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이 엄청난 위력으로 서유럽 전통적 육군 강국이던 [[프랑스 침공|프랑스를 단 6주 만에 점령하고]] [[영국 본토 항공전|영국을 수세에 몰리게 하며]] 히틀러는 완벽한 계산 하에 전쟁을 일으킨 대단한 효웅이고, 독일의 전력은 대단하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이러한 까닭에 스탈린은 [[양면전쟁]]의 한계와 [[라스푸티차|러시아 기후의 무서움]]을 히틀러가 계산하고 있을 것이라 여겨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역으로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켜 버리자 히틀러에 대한 고평가는 역으로 '러시아를 이길 만해서 전쟁을 일으킨 게 아닐까? 우리의 정보가 잘못됐었나? 독일이 신기술을 개발했나? 하여간 우린 끝이야!' 와 같은 사고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런 경우 충격에 빠져 아무것도 못하는 지도자도 역사 속에 종종 있으나, 스탈린은 어쨌건 일단은 싸울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고 금세 충격에서 일어선 편이다.] 방송 연설은 몰로토프에게 맡겨놓았는데,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자신을 위협하거나 깎아내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그 업무를 맡겼다. 스탈린은 다음 날부터는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며칠 후에는 하루에 14시간 정도를 일하면서 전쟁을 지휘할 정도로 괜찮아졌다고 한다. 소련 지도부는 일단 적이 코앞에 와있었기 때문에 어찌저찌 전열을 정비하고 독일군과 싸우는데 정신이 없었지만, 전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던 스탈린에 의해 소련군이 입은 피해가 심각하다는 것을 안 많은 사람들은 점점 '''"왜 스탈린이 서기장으로서 전쟁 역할을 수행하는가?"'''에 대해서 심각한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수수께끼 같은 행동을 벌이게 된다. 1941년 6월 29일부터 측근과 장군들은 스탈린이 연락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즉 스탈린이 실종된 것이다. 당황한 사람들이 스탈린의 행방을 알아보니 스탈린은 며칠간 출근하지도 않고 관저에 숨죽이며 틀어박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워낙 급박하게 돌아갔기에 소련 지휘부는 일단 스탈린이 없는 가운데에 할 일을 계속 했지만, 스탈린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그들은 왠지 모를 불안감이 생겼다. 그들은 항상 스탈린에게 명령을 받아 움직였으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서 스탈린이 갑자기 돌아온 뒤 자신들을 무슨 트집을 잡아 [[숙청]]시킬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보다 못한 몰로토프 등의 심복들은 스탈린의 관저로 가서 스탈린에게 대책을 세워야 할 거 아니냐고 요구하기 위해 그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먼저 스탈린을 설득하기로 하고[* 이때 니콜라이 보즈네센스키는 만약에 그래도 스탈린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스탈린이 아니라 몰로토프에게 전쟁 지휘권을 달라고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의 관저로 찾아갔다. 그들이 본 관저에 있던 스탈린은 축 늘어져서 안락의자에 앉아있었는데, 자신들이 오자 "무슨 일이오?"라고 물었다. 나중에 출판된 미코얀의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갑자기 찾아온 측근들을 경계하는 눈치였으며 굉장히 나약하고 의기소침해 보이는 모습이어서 그런 스탈린의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스탈린을 찾아간 간부들은 스탈린에게 전쟁을 이끌 사람의 필요성을 이야기했고, 그러자 스탈린은 "그래서 누가 전쟁을 지휘할 것인가?"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심복들은 "당신이 전쟁을 지휘해 주시오."라고 이야기했고, 스탈린은 꽤나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그 제안을 승낙하여 전쟁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 일화들은 굉장히 유명하지만 신빙성이 의심된다. 미코얀의 회고록에는 스탈린이 측근들이 스탈린을 불신임하고 체포하러 온 줄 알았다는 눈치라고 생각했다고 적혀있었고, 이 때문에 로버트 서비스(Robert Service),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 등 여러 저명한 연구자들의 저서에도 스탈린이 체포를 두려워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었으나 이는 사실 미코얀의 아들인 [[https://en.m.wikipedia.org/wiki/Sergo_Mikoyan|세르고 미코얀]](Sergo Mikoyan, 1929~2010)이 아버지의 회고록을 멋대로 조작한 내용이었고 미코얀이 직접 기술한 회고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이는 나중에 미코얀의 회고록 초판이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그리고 이후 문서고가 개방되면서 스탈린의 근무 기록도 발굴되었는데, 6월 29일과 6월 30일 이틀을 제외하고 스탈린은 전쟁이 발발한 6월 22일부터 매우 바쁘게 전쟁을 지휘한 것이 확인되었다. 몰로토프는 스탈린이 의기소침해서 은거했다는 챠콥스키의 주장에 대해서 황당한 소리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당시 스탈린이 굉장히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있던 것은 몰로토프도 인정했는데, 스탈린이 "레닌이 남겨준 소련을 말아먹었어"라고 스스로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에 몰로토프는 스탈린을 진정시키려 했다고 하는데, [[라브렌티 베리야]]는 '''"스탈린의 나약한 모습을 본 미코얀과 몰로토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라는 섬뜩한 예언을 했다.[* 그러나 미코얀과 몰로토프 모두 정치적 굴곡은 있었을지언정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각각 1978년과 1986년에 사망) 오히려 스탈린 시절의 악행으로 모두에게 원한을 산 베리야는 1953년 총살형을 당하면서 제 명에 못 죽은 셈이 되었다.] 어쨌거나 스탈린은 매우 열정적으로 전쟁을 지휘했다. 이것이 지나쳐서 몇몇 군사 작전에 개입했다가 수백만의 병력을 날려먹긴 했지만, 자신이 개입해봐야 별로 좋을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후로는 직업군인이 짠 작전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히틀러는 [[청색 작전|이와 반대로 전쟁에 더욱 개입해서]] 안 그래도 시궁창이었던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스탈린과 히틀러의 군에 대한 자세와 태도를 비교할 수 있는 일화가 있다. [[쿠르스크 전투#s-3|성채 작전]] 당시 히틀러는 군사 작전과 행정에 온갖 간섭을 하여 혼란과 비효율성을 이끌어냈고, 막판에는 [[이탈리아 전선#s-2|서부 연합의 이탈리아 침공]]이 이뤄지자 이탈리아의 중요성을 장성들에게 역설하며 그나마 조금씩 성과를 내던 작전을 취소시켜 버렸다. 물론 이건 이탈리아가 추축국 진영에 있어 주요국이라는 정치적 상징성과 이탈리아를 내주면 남독일에서 방어전을 해야 한다는 군사적 중요성이 있는 지시이긴 했다.][* 소련은 [[바그라티온 작전]] 당시 군사 회의에서 한 개의 돌파구에 전력을 집중해야 한다는 스탈린과 적어도 두 개 이상의 돌파구를 열어 독일군에게 혼란과 피해를 강요해야 한다는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로코솝스키에게 다시 한 번 더 생각해 보라며 그를 두 번이나 돌려세웠으나, 로코솝스키가 계속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자 스탈린은 로코솝스키에게 다가가 어깨 위에 손을 얹었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스탈린이 로코솝스키의 계급장을 떼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네의 타당한 판단이 자네의 자신감을 받쳐주는 것이겠지."'''라며 로코솝스키의 제안을 따랐다. 그리고 작전은 대성공.] 1941년 11월 7일 모스크바 10월 혁명 퍼레이드 중, 스탈린은 행진하는 부대를 향해 레닌의 묘소에서 짧은 연설을 했다. >앞으로 몇 개월 안에, 반년이나 어쩌면 1년 이내에, 히틀러의 독일은 그들이 저지른 죄악의 무게로 인해 붕괴할 것입니다. >----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p.375 가장 큰 위기는 1941년 12월의 [[모스크바 공방전]]이였는데, 스탈린은 정부 부서를 모두 동쪽으로 피난시켰으면서도 시와 운명을 함께할 것이라고 선언했고 실제로 공방전 내내 모스크바를 지키면서 방위전을 독려했다. 이후 주코프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활약으로 모스크바는 성공적으로 사수되었다. 모스크바 전투에서 독일군은 수십만 이상의 병력과 1,300대의 탱크 2,500문의 대포 및 1만 5,000대 이상의 차량과 훨씬 더 많은 군수품을 잃었는데, 개전 이래 6개월 만에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받은 가장 큰 피해였다.[* K. K. Rokossovsky, A Soldier's Duty (Moscow: Progress Publishers, 1985), p. 87] 이후 스탈린은 총사령관 대리인 주코프에게 작전 지도를 맡기고, 자신은 자는 시간을 빼놓고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하면서 전쟁 수행에 필요한 행정을 총괄했다. 스탈린은 전쟁 전부터 총괄하던 일반 행정뿐만 아니라 군 업무로부터 군수 생산, 그리고 서방의 원조까지 거의 모든 방면의 세부 사항을 직접 관리하면서 실무진에게 엄청난 압박감을 주었고, 이들은 살아있는 저승사자였던 스탈린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죽도록 일을 했다. 이 당시는 대숙청 기간이 아니었으나 스탈린의 지시를 완수하지 못한 자는 [[굴라그]]로 가거나 혹은 처형되었다. 이런 면에서 스탈린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소련의 승리에 일정 부분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무리한 작업은 스탈린의 건강을 크게 악화시켰는데, 주코프가 회상하기를 스탈린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노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얼굴은 쭈글쭈글해졌으며, 눈은 심하게 쳐지고 몸동작도 느려졌으며 머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얘졌다고 한다. 실제로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때와 1945년 [[얄타 회담]]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6년밖에 안 지났는데 스탈린의 머리나 수염이 모두 새하얘졌다는 걸 알 수 있다. 각 항목에 사진이 있으니 참조할 것. 주코프가 작전 계획을 짜는 동안 스탈린은 정치가들을 이용하여 군수물자의 생산을 늘리도록 했고, 1942년 소련은 놀라운 성과를 달생했다. 소련의 경제는 1942년 후반 여섯 달 동안 독일이 그해를 통틀어 얻을 수 있었던 생산 수준에 도달했을 정도로 활성화되었고, 그 반년 동안 소련은 1만 5,000대의 항공기와 1만 3,000대의 탱크를 생산해냈다. 즉 탱크와 항공기 생산에서 엄청난 성과를 올려 독일군의 침략을 상대했던 것이다.[* 스탈린 강철권력 p.714~15를 참조] 어쨌든 붉은 군대는 모스크바 공방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레닌그라드 포위전]], [[바그라티온 작전]]을 비롯한 전투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고, [[베를린 전투|베를린을 함락시킴으로써]] 1945년 5월 9일 마침내 주코프는 독일 국방군 [[총참모장]] [[빌헬름 카이텔]]로부터 항복 문서를 받아냈다. 마침내 4년 간의 지옥 같던 독소전쟁이 소련의 승리로 종전된 것이다. 당시 소련인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달리 설명할 필요도 없다. 모스크바에서는 축포가 1000여 발이나 발사되었고 화려한 불꽃놀이가 벌어졌으며, 무엇보다도 모두들 엄청나게 마셔댔다. 비록 본진이 탈탈 털려서 식량은 없었지만 보드카는 넘쳐나서 술은 잔뜩 마실 수 있었으며 경찰들은 사람들이 고성방가를 하거나 오줌을 벽에다가 싸는 것도 눈감아주었다고 한다. 스탈린을 연구한 학자 제프리 로버츠는 전시지도자로서의 스탈린이 매우 탁월한 지도자였다고 평가했다. 로버츠는 '스탈린은 매우 유능하고 대단히 성공적인 전쟁 지도자였다. 스탈린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고[* 227호 명령,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의 교전 금지 등] 수많은 인민의 죽음을 야기했지만, 그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소련은 나치 독일에 맞선 전쟁에서 패배했을 것이다. 처칠, 히틀러, 무솔리니, 루스벨트, 그들은 모두 군사 지도자로서 보자면 대체 가능한 인물이었지만 스탈린은 그렇지 않았다'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역, <스탈린의 전쟁>, 열린책들, 2022, p.7.] 앞에서 언급한 모스크바 공방전부터 베를린 공방전까지 스탈린이 지휘한 소련군은 600개 이상의 적 사단(독일군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핀란드, 크로아티아군을 포함해)을 괴멸시켰다. 특히 독일의 경우 동부전선에서 300만 명의 사망자를 포함해 1,0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독일 총 전쟁 사상자의 75%), 히틀러의 추축 동맹국들은 100만 명을 잃었다. 붉은 군대는 전쟁 기간 동안 4만 8,000대의 적군 탱크, 16만 7,000문의 대포, 7만 7,000대의 항공기를 파괴했다.[* 제프리 로버츠, 김남섭 역, <스탈린의 전쟁>, 열린책들, 2022, p.45~46.] 결과론적인 말이긴 하나 연합국들 중 가장 많은 독일군과 추축군의 병기와 병력들을 파괴하는데에 일조했다는 점에서 스탈린이 전시지도자로서 발휘한 탁월한 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가슴 벅찬(?) 승리에 스탈린 자신도 대단한 감명을 받았음은 분명해 보인다.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소원해진 지 꽤 오래되었음에도 전승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스탈린에게 전화를 걸어 "드디어 우리가 이겼어요!"라며 축하의 인사를 건냈다. 스탈린 또한 이날만큼은 딸에 대한 나쁜 감정을 잊어버리고 감동과 기쁨에 가득 찬 목소리로 "그래, 우리가 이겼구나."라는 말로 화답하였다. 그런데 정작 스베틀라나와 이야기를 나눈 후에 부하들로부터 승전을 축하하는 전화가 걸려왔을 때는 "지금 한가하게 전화나 하고 있을 때란 말이오?"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해 6월 24일, 모스크바에서 역사적인 전승 기념 개선식이 벌어졌다. [[러시아 제국]] 시절부터의 오래된 전통에 의하면 개선식의 첫 장면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고 사령관이 백마를 타고 그림처럼 달려나가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론 여기서 최고 사령관은 주코프가 아니라 스탈린이어야 했다. 그러나 이 그림은 완성될 수 없었는데, 기병대 정치위원을 하던 것도 벌써 수십 년 전의 일이고 몸도 예전같지 않아 말을 다루기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스탈린도 아예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라 연습을 위해 멋들어진 아랍산 백마에 올라타보긴 했는데, 놀란 말이 앞다리를 치켜 들어 스탈린을 땅바닥에 굴려버렸다. 머리와 어깨를 다친데다 기분까지 상한 스탈린은 "주코프더러 행렬의 선두에 서라고 하시오. 그는 노련한 기병이니까."라고 하면서 주코프를 다시 호출했다. 주코프는 스탈린으로부터 말을 잘 다루냐는 질문을 받았고[* 물론 주코프는 [[러시아 내전]] 당시 기병 장교였으니 이런 질문은 물을 가치조차 없었다.], 이 독재자가 자신을 시기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주코프는 본능에 가까운 아부로 당연히 스탈린이 최고사령관으로 행렬에 선두에 서야 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자신은 너무 늙어서 힘들다며 주코프에게 선두에 설 것을 명령했고, 가장 높은 곳에서 말을 타고 가는 주코프를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파일:/pds/201405/10/60/f0205060_536dbd5c58c0f.jpg|width=650]] 백마를 타고 개선식을 하는 주코프. 원래는 스탈린이 타고 있었어야 할 장면이었다.[* 옆에 있는 동료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로코솝스키는 저때 흑마를 타고 반대편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뒤에 두 사람이 나란히 달리는 장면을 보면 로코솝스키는 흑마를 타고 있었기 때문에 위 사진에서 뒤를 따르는 인물은 로코솝스키일 수 없다.] 어쨌든 그렇게 전쟁에서 승리하자 전쟁 이전부터 우상화가 진행되고 있던 스탈린은 이제 '승리의 지도자'라는 업적까지 더해지면서 소련에서는 그야말로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런 것들이 종교화의 레벨까지 이르러 [[반종교]]를 표방하는 [[프라우다]]지에서조차 공개적으로 "자신의 일이 잘 안 될 때, 그분(즉 스탈린)에게 기원하면 모든 게 이루어질 것이다"라는 사설을 쓸 정도였다. 아래는 당시 프라우다지의 사설. >당신의 작업이 어려움에 부딪히거나 혹은 자신의 능력이 의심스러울 때,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확신을 얻게 될 것이오. > >당신이 기운을 차려야 할 때 피곤함을 느끼거든,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일이 수월해 질 것이오. > >당신이 어려운 결정을 내리고자 할 때, 그 분을 생각하시오. 스탈린을... >그러면 올바른 결정을 내리게 될 것이오. > >스탈린이 말한 것은 인민들이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인민들이 말한 것은 스탈린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오... >---- >[[http://epoque.egloos.com/3474286|1950년 6월 20일자 프라우다 기사에서]]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스탈린은 1945년 5월, 크렘린에서 벌어진 독소전쟁 축하연 연설에서 "우리의 승리에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모든 것은 소련 인민들의 피와 땀이 이룩한 것입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아래는 당시 연설 중 일부. >우리는 1941년과 1942년 사이의 절망적인 상황을 경험했습니다. > >그때 정부는 인민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독일과 강화를 맺기 위해 새로운 정부를 세워야 한다라고 생각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인민은 이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 >여러분! 감사합니다. 승리의 확신을 가졌던 모든 러시아 인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어떤 역사가는 이 연설이 스탈린이 한 연설 중에서 가장 정직한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스탈린은 "나치를 정리하고 3개월 뒤에 [[일본 제국|일본]]과 전쟁을 시작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유럽에 있던 붉은 군대를 시베리아 열차에 태워 극동 주변에 배치했다. 그리고 1945년 8월 9일, 150만 명이 넘는 소련군이 26,000문의 야포와 5,300대의 전차, 그리고 4,500대에 달하는 항공기와 함께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개시하였다. 소련군은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이후에도 진격을 계속하여 21일부터 23일 사이 [[원산]]과 [[함흥]], 그리고 [[평양]]은 물론 [[개성]]까지 진주했다.[* 개성은 엄밀히 말하면 38도선 이남이었지만 미군이 진주하는 9월 초까지, 그 이후로도 소련군이 월경했던 곳이다.] 또한 극동의 소련군은 1945년 8월 18일 사할린 섬을 차지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러일전쟁]]에서 잃었던 남사할린을 다시 되찾았고 쿠릴 열도까지 차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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